13번째 향은 처음에 두 가지를 기대하며 조향했습니다.
하나는 그랑핸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세가지 향(마린 오키드, 수지 살몬, 스위핑 피오니)을 위협할 만큼
호불호 없이 좋은 향이었으면,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 동시에 흔하거나 뻔하지 않은 향이었으면.
그랑핸드 프래그런스 라인은 플로럴 계열의 비중이 높아 이번에는 패션 후르츠를 메인으로 한 프루티 노트로
방향성을 설정했고, 달콤하지만 끈적이지 않고 청량감이 있는 이국적인 향이 만들어졌습니다.

fruit de la passion
fruit de la passion

향이 완성되고 나서는 향의 이름을 짓기 위해 각자 향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한 이름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막연히 떠오르는 사물, 풍경이나 지역, 이 향이 날 것 같은 사람의 외형과 내면, 어울리는 영화나 노래, 사적인 추억과 사건들 등
생각나는 대로 끄집어내다 보면 그 안에서 이야기가 엮이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향에 대한 객관적인 느낌은 크게 다르진 않지만 서로가 향을 받아드리는 관점의 차이도 알 수 있고,
자신도 몰랐던 생각들이 나오기도 해 매우 흥미로운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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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향에서 발견한 재밌는 부분은 향의 첫 인상은 굉장히 생기 넘치고 발랄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냥 행복하지 만은 않은,
감춰진 씁쓸한 부분이 있을 것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아이러니함이 롤랑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직원들의 뒤섞인 생각의 타래에서 실을 뽑듯 롤랑만의 이야기를 뽑아냅니다.

처음에는 남쪽 섬에 사는 어느 물개 조련사를 떠올렸습니다. 더이상 아무도 오지않는 곳이지만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혀 차마 그 곳을 떠나지 못하는. 어디서 많이 본 영화같은 설정이 진부해 처음부터 다시 고민합니다.
가장 많이 언급된 표현들, 이국적, 하와이, 휴양지, 동남아, 비옥한 땅과 열대과일, 낙천적인 사람..
도상화 된 낙원의 이미지를 떠올리다 낙원 그 자체를 의미를 다르게 바라봅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다’라는 어느 만화의 대사가 떠올랐고,
의미가 사라진 조금은 허무한 공간으로서의 낙원에 대한 롤랑의 이야기가 완성되었습니다.
롤랑의 낙원은 되려 도망쳐 온 곳을 그리게 하는 아이러니함이 있습니다.

Photo by Jakob Owens
Photo by Jakob Owens

‘내가 자란 곳과는 다른 온화한 날씨, 풍족한 과일들, 그을린 피부만큼 밝게 빛나는 사람들의 표정과 여유로움,
그리고 마음껏 품으로 뛰어들 수 있는 산과 바다. 평생의 이상향이었던 풍경은 어느덧 익숙한 일상이 되었고
모든 것이 완벽했던 낙원은 익숙해진 만큼 그 의미를 차츰 잃어갔다. 한 평생 나를 괴롭혔던 도시를 도망치듯 떠나
몇 년 전 정착한 이곳에서 나는 여전히 부유하며 매일 밤 고향의 꿈을 꾼다.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선 나의 안식이 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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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낙원의 모습과 도시에 대한 향수라는 대비적 풍경을 담은 키 비주얼을 완성했습니다.
포스터, 엽서, 쇼핑백 등 다양한 응용 디자인 작업으로 풀어내고 각 팀에선 제품 출시를 준비합니다. 롤랑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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