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후각으로 읽는 사진: 로라 레틴스키

2022-09-23
조회수 5157

어느새 여름의 끝자락입니다. 매미 소리는 잦아들고, 귀뚜라미 소리가 그 자리를 대체하죠. 독자분들은 이번 여름도 무탈히 보내셨는지요. 계절이 느릿느릿 바뀌고 있는 요즘, 어떤 기억과 추억을 담아내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만약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맞닥뜨렸다면 찰나의 냄새와 풍경을 곱씹어 보길 바랍니다. 우리의 시각, 후각적 기억은 마치 순간을 포착한 사진처럼 파편화돼 있고,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격발하니까요.



After Yang (2022) - Mika Memory


이러한 기억의 특성은 영화 <애프터 양>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애프터 양>은 가까운 미래가 배경으로, 안드로이드 ‘양’과 함께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양은 매일 3초씩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자신의 메모리 카드에 저장했고, 양이 고장 나자 가족들은 양이 기록한 3초들을 확인하게 되는데요. 양이 기억 저장소에 담아둔 순간들은 평범하리만치 일상적인 풍경이었습니다. 해가 뉘엿한 오후 나무의 그림자, 아무렇게 널어둔 세탁물이 미지근한 햇볕 아래 말라가는 순간, 어질러진 접시와 식기구, 물 위로 부유하는 찻잎들. 이와 같은 기억 사이의 연관성을 유추해보자면 평온과 행복 아닐는지요. 이런 나열 앞에 어떤 기억과 냄새를 간접적으로 느끼시나요?


<애프터 양>의 감독이 기억의 편린을 인서트 컷으로 보여준 것처럼, 일상적 도구를 조명함으로써 아름다운 순간을 묘사하는 데에 탁월한 아티스트도 있습니다. 바로 이번 아티클의 주인공 캐나다 출신 사진가 로라 레틴스키(Laura Letinsky)입니다.



로라 레틴스키의 고유한 시선


© Kathrin Leisch


로라 레틴스키는 오랜 시간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하며 자신만의 무드를 만들어간 사진가입니다. 그는 작업 초반, 커플 사진을 촬영하며 사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로맨틱한 장면을 묘사했는데요. 장르적 관습에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사진을 일인칭 관점으로 전환해 정물 사진에 집중합니다. 이때부터 그의 놀라운 시각이 빛을 발하죠. 그에게 정물은 무수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습니다. 사진을 통해 우리가 주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지, 보는 이의 감각을 어떻게 깨울 수 있는지를 탐색했습니다.



© Laura Letinsky


그의 사진이 묘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정물을 사용해 어떤 순간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장기 시리즈 중 하나인 ‘Hardly More Than Ever’은 더러운 그릇, 먹다 남은 과일, 꽃병 등 식탁 위 풍경을 너저분하게 연출한 것이 특징입니다. SNS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이미지 중 하나로 보일 수 있지만 해당 시리즈는 1997년부터 2004년까지의 진행된 작업으로, 작가의 치밀한 설계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위 사진을 살펴보면 정갈하게 꾸며진 인위적인 모습이 아닌, 누군가의 분명한 존재감이 느껴지는데요. 그의 사진은 마치 식사 자리에 늦게 도착한 사람의 시선과 같습니다. 그의 의도에 따라 관찰자가 된 우리는 그의 사진에서 어렴풋이 남은 향을 느낄 수 있지요. 파랗도록 하얀 식탁보에 엎어진 와인 냄새, 뭉개진 디저트 조각에서 느껴지는 바닐라 향, 접시 위 레몬의 존재감까지. 몽롱함을 머금은 나른한 한낮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 Willem Claesz Heda


전통적인 정물화가 화려하고 완벽하게 세팅된 정물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한다면, 레틴스키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영감을 받아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를 현실감 있게 담아냅니다. 공산품, 먹고 남은 껍질, 쓰레기 등으로 이뤄진 현대의 식탁 풍경을 오롯이 연출하죠. 피사체의 상징적인 요소, 쉐입을 강조하기 보다는 사진이 줄 수 있는 현장성에 집중한 시점에 대한 탐구가 두드러집니다.


© Laura Letinsky


‘Hardly More Than Ever’ 시리즈는 일상에서 잊히기 쉬운 세부 사항, 일상의 잔재를 진정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사진 어디에도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개인적인 경험이 담겨 있죠. 그의 사진 속 풍경은 순간의 향과 냄새를 유추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이고, 생동합니다. 로라 레틴스키는 보는 이들이 자신의 작업을 통해 사람들이 일상적 사물을 달리 보고, 그들에게서 영감을 얻길 바랐는데요. 그의 사진은 개인적인 경험을 대입해, 후각으로 읽었을 때 비로소 진가가 발휘됩니다. 그가 사진이란 매체를 활용해 정물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방식에 대해 조금 더 가까이 살펴봅시다. 



정물이 기억의 매개가 될 때


© Laura Letinsky


위 사진의 첫인상은 어떠한가요. 은근한 빛이 쏟아지는 평화로운 오후, 미처 정리되지 못한 테이블을 닮지 않았나요? 신선한 과일과 대비되는 사탕, 형형색색 젤리 조각들도 눈에 띕니다. 사진가는 서로 다른 물성을 지닌 두 가지 피사체를 일부러 나열하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과일과 달리 인공적인 물체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첫 번째 사진은 사진가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데요. 구겨진 식탁보 위 더러운 식기들과 과일, 남겨진 막대 사탕이 놓여 있죠. 어딘가 눅눅하면서도 달큰한 냄새가 공간 전체에 번져 있을 것만 같은 풍경입니다. 낯선 장소와 물건들이지만, 알 수 없는 기억을 불러일으켜 사진 안에 머무를 수 있게 합니다.


© Laura Letinsky


그의 작품에서 ‘평온함' 또는 ‘낭만적인 게으름'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 사진들은 어떤 무기력함, 우울감을 표현합니다. 위태롭게 설치된 화병과 컵, 시들어가는 식물, 알 수 없는 잔해들. 식탁 모서리와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쳐진 사물들은 묘한 긴장감을 부여합니다. 마치 평온한 일상이란 이처럼 위태롭고 깨지기 쉽다는 것을 이야기하듯 말이죠.


© Laura Letinsky


다시 사진가가 구현해낸 세계를 상상해 볼까요? 바싹 마른 꽃잎이 내뿜는 은은한 향과 먼지가 내려앉은 공간의 텁텁함. 과육이 남아있는 오렌지 껍질 냄새와 바스러진 크래커의 존재감까지. 이색적인 풍경에서 생경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른하면서도 감정의 한 귀퉁이에는 낮섦과 불안함이 교차하죠. 찰나의 공기가 농도 짙게 느껴지는 순간, 이런 이질감을 탐미할수록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가닿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단순히 보이는 것이 사진의 전부는 아닙니다. 관찰자 시선의 온도, 풍경이 만들어진 맥락은 보통 사진 뒤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경험의 총합에 의해 제각각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작품이 연출한 장면과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 있다면 순간을 꺼내 볼 수 있겠죠. 그의 사진은 단편적으로 보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순간을 떠올리고 과거를 상상하게 하며 특수한 기억을 건드립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만들어낸 일상적 풍경은 감정을 자극하고, 주변의 사물들이 발산하는 메시지를 다시 보게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장면들은 생각보다 특별한 순간이 아닌, 다분히 일상적인 요소로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양의 기억에서 찾은 평범한 일상과 로라 레틴스키가 포착한 게으른 식탁 풍경처럼 말이죠.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순간순간을 인식하고 있나요? 오롯이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그날의 향과 분위기,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해보세요. 우리는 생각보다 작은 요소들에 감동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Sometimes you win, 

Sometimes you learn.

향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지만, 우리에게 수많은 기억과 감정을 각인시키고, 나아가 우리 삶 속에서 많은 부분을 결정합니다. 그랑핸드는 이러한 향의 가치를 믿으며, 이를 매개로 한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향의 일상화를 꿈꿉니다. 그랑핸드는 쉽게 소비되고 잊혀질 무언가가 아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뚜렷한 존재감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마음과 온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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